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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아트코리아TV] [정병모 미술평론] 민화가 동화와 만날 때
글쓴이 dk*** 등록일 2025-12-09 조회 19

[정병모 미술평론] 민화가 동화와 만날 때

 

지현경의 서사적 상상력

 

 

호랑이 책가, 140×70cm, 순지에 아크릴, 2025-사진 작가제공

 

스토리텔링은 오늘날 현대미술 속에서 다시 중요한 미학적 화두로 부상하고 있다. 점·선·면, 원색과 같은 조형 요소 자체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추구한 추상미술은 삶의 이야기가 지닌 구체성과 서사를 중심에서 배제했다. 그러나 백 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 예술은 다시 이야기로 돌아오고 있다. 이야기는 본래 인간의 가장 본능적인 표현 방식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커뮤니케이션 학자 월터 피셔(Walter R. Fisher)가 “인간은 이야기하는 존재(Homo Narrans)”라고 정의했듯, 인간은 세계를 이야기로 이해하고, 이야기로 자신을 증명한다. 추상미술의 시대 속에서 한때 사라질 듯 보였던 서사적 회화는 오늘 다시 살아나고 있으며, 이는 형식의 실험을 충분히 통과한 이후에 되찾는 ‘서사의 귀환’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변화 속에서 민화는 매우 특별한 위상을 차지한다. 민화는 본래부터 스토리텔링의 보고(寶庫)와도 같은 회화 장르다. 화면 속에는 설화에서 비롯된 이야기뿐 아니라, 길상과 소망, 삶의 염원이 투영된 상징의 서사까지 중층적으로 펼쳐져 있다. 여기에 동화적 상상력이 더해질 때, 민화의 서사는 한층 더 넓은 세계로 확장된다. 특히 민화 특유의 한국적인 이미지와 정서는 캐릭터화와 의인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이야기 속으로 스며들며, 민화와 동화의 결합은 한국적인 정서가 살아 숨 쉬는 친근한 서사 공간을 형성한다.

 

지현경 작품의 제목들만 보아도 서사적 상상력이 얼마나 풍부한지 알 수 있다. “우리 집에 용도 살고 기린도 산다”, “검사공부”, “올해는 금연”, “범 내려온다”, “서울쥐와 시골 쥐”, “용의 서재”, “뭐 하세요” 등 개별 작품의 제목들 또한 관람자로 하여금 화면 너머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상상하도록 이끈다. 2026년 4월 한옥 갤러리에서 열릴 전시의 제목 역시 “서서 걷는다고 무리해서 쫓겨 난 아기호랑이의 여정”이라는, 그 자체로 하나의 동화적 사건을 품고 있다.

 

 

 금연하세요, 80×50cm, 순지에 분채, 아크릴, 2023-사진 작가제공 

 

마치 공공포스터의 제목같은 “올해는 금연”이란 그림은 전통 민화에 자주 등장하는 ‘담배 먹는 호랑이’ 도상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장죽을 피우는 호랑이 곁에서 토끼가 담뱃대를 붙잡고 말리는 장면이 익살스럽게 펼쳐진다. 전통 민화에서 양반이나 탐관오리 같은 권력자인 호랑이를, 백성을 상징하는 토끼가 시중을 든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토끼는 마치 가족이나 배우자처럼 호랑이를 걱정하며 “담배는 몸에 해롭다”고 단호하게 제지하는 존재로 변신한다. 민화의 소재와 해학은 그대로 계승하되, 그 서사는 오늘날의 생활 감각으로 전환되며 현대적 풍자를 펼친다.

 

 

범내려온다, 70×70cm, 순지에 아크릴, 2024-사진 작가제공

 

 

이날치가 판소리 〈수궁가〉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부른 곡인 “범 내려온다”를 다시 민화적으로 변주한 작품이다. 배경의 산세는 일월오봉도의 도상을 차용하고, ‘토생원’을 부르려다 발음을 잘못해 ‘호생원’이라 부르는 바람에 산의 임금인 호랑이가 내려오고 있다. 이 모습은 민화 〈까치호랑이〉의 익살스런 캐릭터에서 착안했다. 작가는 전통 민화의 도상을 적극 변용하여, 오늘의 감각으로 새롭게 태어난 또 하나의 민화 <범 내려온다>를 창안했다.

 

 

민화와 동화의 만남은 단순한 장르의 결합을 넘어, 인식의 질서를 전환하는 상상력의 장을 형성한다. 민화 속 호랑이나 까치처럼 익숙한 존재들이 동화책의 주인공이 되는 장면은, 우리가 익숙하다고 여겨온 세계의 규칙을 뒤집으며 낯설음의 즐거움과 함께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보인다.

 

이보다 더 큰 가치는 민화가 품고 있던 한국적인 정서와 상징은 동화의 언어를 통해 한결 부드럽고 따뜻한 이야기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민화는 가장 한국적인 그림인 만큼, 그 속에는 한국인의 삶의 감정과 마음결이 고스란히 스며 있으며, 민화가 지닌 익살과 소박함은 동화의 리듬 속에서 자연스럽게 풀어져 세대와 연령을 넘어서는 친근한 서사 세계를 구축한다.

 

지현경의 작업에서 이러한 서사적 상상력은 책거리 연작에서 특히 인상적으로 드러난다. 민화의 책거리 안에는 호랑이와 용 같은 동물들이 모여 앉아 책을 읽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그들이 집중하다보니, 주변의 해태, 기린, 비둘기, 사마귀 같은 곤충들까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화면 안을 들여다본다.

 

호랑이들은 각자 나름 독서삼매에 빠져 있다. 어린 호랑이는 책을 읽는 자기 모습을 봐주기를 바라는 듯 우리를 쳐다보고 있고, 글을 모르는 호랑이는 그림책 속 호랑이 이미지를 손으로 가리키며 신기해한다. 또 다른 호랑이는 책 표지에 그려진 꽃문양을 진짜 먹을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한 듯 붉은 혀로 조심스레 맛본다.

 

 

우리집엔 용도 살고 가린도 산다, 110×140cm, 순지에 수간분채, 2022-사진 작가제공

 

 

“우리 집에 용도 살고 기린도 산다”에는 용과 기린이 장 안에 들어와 앉아 있다. 작가는 어렸을 적 다락방에 숨어있던 추억에서 이 장면을 떠올렸다. 성질 급한 용은 수박을 부산하게 먹다가 장 안의 물건들이 쏟아져 나와 난장판을 벌인 반면, 소심한 기린은 얌전하게 연꽃을 담은 어향을 가슴에 품고 다소곳이 앉아 있다.

 

이런 장면을 보고 있으면, 책거리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고정된 정물이 아니라, 누구나 들어가 보고 싶어지는 ‘이야기 속 공간’처럼 느껴진다. 작가는 관람자에게 “이 안으로 들어와 보세요. 읽고, 보고, 마음껏 즐기세요.”라고 유혹한다. 이 책거리는 단순한 정물의 재현이 아니라, 감상자의 시선과 상상력이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참여형 서사의 공간이다.

 

지현경의 그림은 동화처럼 천진난만하고, 민화처럼 익살스럽다. 밝은 채색은 그의 이야기를 더욱 유쾌하게 만들고, 화면 속 동물들은 오늘도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밝고 경쾌한 채색은 이러한 이야기의 세계를 더욱 따뜻하고 유쾌하게 완성한다. 다만 그림책 작업에서 비롯된 비교적 가는 필선의 성향은 화면의 밀도와 긴장감이라는 측면에서 앞으로 더욱 심화될 과제로 남아 있다.

 

민화가 동화와 만날 때, 그것은 단순한 장르 혼합이 아니라 서사 구조의 재편이다. 지현경의 작업은 민화의 전통적 상징 체계를 해체하지 않으면서도, 이를 동시대의 감각과 생활 서사로 전이시키는 데 성과를 거둔다. 그의 회화는 단순한 민화의 현대화가 아니라 ‘이야기하는 민화’라는 특징적인 분야를 개척했다. 지현경의 작업은 민화의 동시대적 확장 가능성을 가장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지현경의 그림 앞에서 잠시 현실의 속도를 늦추고, 그림 속 숲과 책장 사이로 조용히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그곳에는 여전히 호랑이가 책을 읽고 있고, 용과 기린이 함께 살고 있으며,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은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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